안데스 청염
 
작성일 : 13-10-17 17:33
소금 상식 - 1. 소금의 역사
 글쓴이 : Tresal
조회 : 3,441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에 시체를 소금물에 담갔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하여 소금을 비료로 사용하였다.
 
또 그들은 인간의 생활에 중요한 소금을 신에게 바치고, 신에게 바치는 짐승의 고기는 짜게 하였다.
 
이런 풍습은 그리스 사람이나 로마 사람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소금이 물건의 부패를 방지하고, 물건을 불변으로 하는 힘이 있다고 하여 고대인은
 
소금을 변함 없는 우정 ·성실 ·맹세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성서의 ‘소금의 맹세’는 이런 데서 생긴 것이다.
 
아랍인은 함께 소금을 먹은 사람을 친구로 여기는 풍속이 있다.
 
소금의 이러한 생활상의 중요성 ·귀중성 ·신성한 성질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인 사람을 ‘땅의 소금’이라고 하였다.
 
원시시대에는 바닷물을 증발시켜서 채취하거나 해조(海藻)를 태워서 얻기도 하였는데,
 
사막의 오아시스에는 염분을 함유한 물이 솟아 나와 대상(隊商)은 그것에서 소금을 얻었다.
 
유럽에서는 철기시대부터 암염이 이용되고, 때로는 암염이 있는 곳에 물을 붓고 소금이 녹은 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채취한 일도 있다.
 
또, 사해(死海)나 솔트레이크와 같은 염호에서 얻은 조염(粗鹽)을 녹여 증발시키고 정제하여 소금을 얻었다.
 
동양의 문헌에서는 양(梁)의 도홍경(陶弘景)이 엮었다고 전해지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의약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약물 중독의 해독제로 소개되어 있고, 그 밖에 BC 27세기 재상 숙사씨(宿沙氏)가 처음으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채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에서는 고려 이전의 소금에 대한 문헌은 매우 적다.
 
다만 《삼국지》 <위지동이전(魏璡夷傳)> 고구려조에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대목이 있을 뿐이다.
 
신라나 백제에서도 해안지방에서 소금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도염원(都鹽院)을 두어 염분(鹽盆)을 국가에서 관장하여 직접 소금을 제조 ·판매하여 재정수입원으로 삼았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사유로 이관하였다가 다시 1309년(충선 1) 염정을 민부(民部)에 이관하고 유통부분에서는
 
중국의 입포매법(立涯賣法)과 계구매법(計口賣法)을 모방하여 포(布)를 납부하게 하여 소금을 구입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연안의 주군마다 염장(鹽場)을 설치하여 관가에서 소금을 구워 백성들은 미포와 환물하였는데,
 
1411년(태종 11)에 염장역미법(鹽場易米法)을 폐지하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소금은 국가의 중요한 재정 세원이었다.
 
그리고 궁가와 아문(衙門)경영의 소금은 일부 현물로 수납하고, 일반민영은 세금을 과해 왔다.
 
그 후 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가 되자 소금은 완전히 전매제(專賣制)가 되었고, 1961년에 염전매법이
 
폐지되자 종전의 국유염전과 민영업계로 양분되었다.
 
- 윗글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의 天津綠康천연물연구소 자료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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